“사실을 말했는데 형사처벌? 민사로 해결해야”

제49회 국무회의 이재명대통령 발언 모습
제49회 국무회의 이재명대통령 발언 모습

이재명 대통령이 11일 국무회의에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형법 제307조 제1항)’ 폐지를 검토하라고 정성호 법무부 장관에게 지시하면서 오랜 논쟁이 다시 불붙었다. 이 대통령은 “있는 사실을 이야기한 것을 명예훼손이라고 하는 것은 민사로 해결해야 할 것 같고 형사처벌 할 일이 아니다”라며 “독일이나 해외 법례를 참고해서 시간 걸리지 않게 빨리 개정하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이번 지시는 혐오표현 처벌 형법 개정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이 대통령은 혐오표현에 대한 엄정한 처벌을 주문하면서도, 동시에 진실한 사실을 말하는 것까지 형사처벌하는 현행 제도의 모순을 지적한 것이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란 무엇인가

법원 마크
KBS News 유튜브 영상

현행 형법 제307조 제1항은 “공연히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핵심은 ‘진실한 사실’을 말해도 처벌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다만 형법 제310조는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는 처벌하지 아니한다”는 위법성 조각사유를 두고 있다. 문제는 ‘오로지 공공의 이익’이라는 기준이 매우 엄격하게 적용되면서 피해자들이 자신의 피해를 호소하기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과거 사례 ‘진실을 말한 죄’로 처벌받은 사람들

배드파더스 관련 사진 인스타그램
배드파더스 관련 사진 인스타그램

미투 운동의 족쇄

2018년 미투 운동이 한창이던 시기, 신진영(가명)씨는 SNS에 2012년 직장 엠티에서 방송사 기자로부터 강제추행을 당했다는 글을 올렸다. 가해자는 곧바로 그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추행 사건 고소를 취하할 것을 요구했다. 압박을 견디지 못한 신씨는 고소를 취하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검찰은 미투 운동이라는 공익적 목적을 인정해 혐의없음 처분을 내렸지만, 피해자가 겪어야 했던 고통은 컸다.

배드파더스 사건

2018년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부모들의 신상정보를 공개한 ‘배드파더스’ 운영자 구본창 대표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했다. 1심에서는 무죄를 받았지만, 대법원은 2024년 10월 벌금 100만원 선고유예를 확정했다. 진실을 말했고 공익적 목적이 있었음에도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이다.

가정폭력 피해자의 1인 시위

이진숙(가명)씨는 18년간 법적 혼인관계를 유지한 판사 출신 변호사 전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리기 위해 2019년 팻말을 들고 1인 시위를 했다. 외도 정황이 담긴 영상과 녹취록을 제출했지만, 법원은 “팻말 내용이 전남편을 특정할 수 있다”는 이유로 1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의료사고 유족의 호소

2017년 의료사고로 환자가 사망한 후, 유족 C씨는 담당 의사의 부적절한 발언을 전단지로 만들어 배포했다. 1심과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대법원은 “공익적 목적이 있다면 처벌하지 않는다”며 파기환송했다. 하지만 유족은 긴 법정 싸움을 견뎌야 했다.

직장 내 언어폭력 고발

2012년 사장으로부터 언어 학대를 당하고 해고당한 여성 경리 직원이 학대 사실을 A4용지에 적어 동료들이 다니는 식당에 배포했다. 사장은 그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법원은 유죄를 선고했다. 피해자가 직접 고발하는 경우 ‘사익’이 개입되어 공익성을 인정받기 어렵다는 것이 이유였다.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2021년 2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에 대해 재판관 5대4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다수의견은 “우리나라의 민사적 구제방법만으로는 형벌과 같은 예방효과를 확보하기 어렵다”, “개인의 약점과 허물을 공연히 적시하는 것은 민주적 의사 형성에 기여하는 표현의 자유 목적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하지만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유남석·이석태·김기영·문형배 재판관은 “진실한 사실 적시 표현행위를 명예훼손죄의 구성요건에 포함시키면 표현의 자유는 형해화될 수 있다”, “진실한 사실이 가려진 채 형성된 허위·과장된 명예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위축효과를 야기하면서까지 보호해야 할 법익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해외 사례의 경우 대다수 국가는 폐지 또는 민사화

미국 형사처벌 거의 없음

미국은 연방법상 명예훼손 처벌 조항이 없다. 매사추세츠, 미네소타, 몬태나, 뉴햄프셔 4개 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명예훼손죄가 폐지됐다. 명예훼손은 민사상 손해배상의 문제로 다뤄지며, 진실한 사실을 말한 경우 면책된다. 1964년 ‘개리슨 대 루이지애나’ 사건 이후 대부분의 주에서 관련 조항을 폐지했다.

영국 2010년 명예훼손죄 완전 폐지

영국은 2010년 “오늘날처럼 표현의 자유가 권리가 아니었던 지나간 시대의 이해할 수 없는 범죄”라며 선동적 명예훼손죄 및 사인 간 명예훼손죄를 아예 폐지했다.

독일 진실 입증시 대부분 무죄

독일도 형법에 명예훼손 규정이 있지만, “진술이 진실임을 증명할 수 없을 때” 처벌하도록 규정해 진실한 사실을 말하면 대부분 처벌하지 않는다. 명예 침해 정도가 큰 공인의 경우에만 진실한 사실을 말해도 명예훼손으로 처벌할 수 있지만, 공익적 목적이 인정되면 역시 처벌하지 않는다.

일본 비교적 높은 진실 면책

일본도 형법에 명예훼손 규정이 있지만, 진실한 사실임이 입증되면 명예훼손죄로 처벌하지 않고 있다.

국제기구의 권고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는 2011년과 2015년 두 차례에 걸쳐 대한민국에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를 권고했다. 유엔은 “명예훼손의 범죄화가 개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필수적인 방법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명예훼손을 형법으로 처리하는 것을 하지 말라”는 입장이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2018년 연구에 따르면, 박경신 고려대 교수가 조사한 28개국 중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가 16개로 인정하는 국가보다 더 많았다.

폐지되면 어떻게 될까

형사처벌 대신 민사소송으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폐지되면 형법상 죄를 물을 수는 없다. 대신 민사상 손해배상 소송을 통해 피해를 구제받을 수 있다. 형사처벌의 범죄 제재 효과는 사라지지만, 금전적 부담을 지워 무분별한 명예훼손 행위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 폐지론자들의 주장이다.

미국의 경우 민사소송에서 천문학적 규모의 배상금이 청구되기도 한다. 다만 한국은 아직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제한적으로만 적용되고 있어, 민사적 구제만으로 충분한 예방효과를 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는 반론도 있다.

표현의 자유 확대

수갑
픽사베이

폐지론자들은 무엇보다 표현의 자유가 크게 신장될 것으로 기대한다. 미투 고발, 소비자 이용 후기, 상사나 권력자의 갑질 행태 폭로, 학교폭력 고발 등 각종 사회 부조리 고발 활동이 활발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사단법인 오픈넷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뿐만 아니라 부조리한 진실들을 은폐시켜 사회의 발전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려되는 점: 사생활 침해와 사적 제재

반대론자들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폐지되면 개인의 사생활이 무분별하게 침해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예를 들어 가족이 범죄자인 사람의 직장에 “A의 가족은 범죄자다”라고 소문내서 직장 생활을 불가능하게 하는 행위, 과거의 전과나 성적지향 등을 공개해 사회생활을 어렵게 만드는 행위 등을 막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또한 진실을 빙자한 사적 제재와 마녀사냥이 횡행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과거의 범죄를 폭로하고 SNS에 유포해 가해자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행위가 일견 정의구현으로 보일 수 있지만, 법치주의 관점에서는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대안: 사생활 비밀 침해로 재구성?

일각에서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완전히 폐지하는 대신, ‘사생활의 비밀을 중대하게 침해하는 사실의 적시’로 축소 개편하자는 제안도 나온다. 최강욱 의원이 발의한 형법 개정안이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공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되, 순수 사생활 영역에 대해서는 일정한 보호장치를 두자는 취지다. 유럽 일부 국가들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국회에 계류 중인 개정안들

현재 국회에는 박주민·김용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최강욱 열린민주당 의원, 조은희 국민의힘 의원 등이 발의한 형법 개정안이 계류 중이다.

  • 박주민 의원안: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와 모욕죄 폐지
  • 김용민 의원안: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
  • 최강욱 의원안: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사생활의 비밀을 중대하게 침해하는 사실의 적시’로 축소
  • 조은희 의원안: 정보통신망법·형법 개정

하지만 이들 개정안은 모두 소관위원회에 계류된 상태로 입법 논의가 지연되고 있었다. 이번 이재명 대통령의 폐지 검토 지시로 논의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전망된다.

결론: 10년 넘게 이어진 논쟁, 이제는 결단의 시점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둘러싼 논란은 이미 10년 이상 계속되어 왔다. 표현의 자유와 개인의 인격권, 무엇이 더 중요한가라는 가치의 충돌이자, 형사처벌과 민사구제의 적절한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의 문제다.

전문가들은 “진실을 말하는 것 자체를 범죄로 규정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과도한 제약”이라는 주장과 “민사적 구제만으로는 충분한 예방효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재명 대통령의 이번 지시가 오랜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한국 사회가 표현의 자유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는 계기가 될지, 아니면 또 다른 사회적 혼란을 가져올지 귀추가 주목된다.

법무부는 독일 등 해외 입법례를 참고해 신속하게 개정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은 “신속히 하겠다”고 답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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